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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고 있던게 확실하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다. 하지만 ‘병든 이데올로기’, ‘악성 정신병에 걸린 비현실적인 나라’ 에서 격하게 우울해진다.
제길… 남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읽고 있는 네덜란드.

그런 다음에는 마치 식품목록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덤덤한 말투로 미국에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적어도 부시 정부가 물러날 때까지, 아니 그 다음 정부 역시 부시 정부의 뒤를 이어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세계를 지배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정부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신체적인 안전의 문제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물론 그런 문제 역시 중요한 요인이지만, 중요한건 제이크를 ‘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다른 나라들에는 문명과 법과 합리적인 규칙을 무자비하게 강요하면서도 미국만은 면제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 비현실적인’ 나라에서 키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겨레21 돈과 사회적 위세. 모르는 내용도 아니고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말야. 병든 이데올로기 혹은 일종의 악성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이겠지?

지나친 궁핍 속에서는 인간적인 삶과 자존감을 갖기 어렵다. 그리고 사회적인 위세를 갖추려면 어느 정도의 물질적 잉여가 있어야 한다. ‘위세’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위엄’이고 다른 하나는 ‘허세’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미묘하게 공존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내용이다. 허세는 자신의 지급 능력을 뽑내면서 타인과의 구별짓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위엄은 그런 외형적 차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 품위를 갖추고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인격과 역량으로 타인의 모자란 것들을 메워주고 남몰래 베풀어주는 너그러움이 거기에 있다. 그러한 덕망의 문화 유전자가 재생될 때, ‘돈만 있는 삶’이 아니라 ‘돈도 있는 삶’이 가능하다.

트위터 덕분에 블로그가 소외받는다. 뭐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한다.

집에서 쉴 때 보고 있는 두 생애에서

슬픔은 고통과, 고통이 불러일으키는 원한을 정화해요.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폭력에 대한 분노를 지운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분노와 원한은 달라요. 폭력에는 분노해야 해요.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예요. 그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예요. 그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 슬픔이예요.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예요.

20세기 사진의 거장전을 보면서 생각난 타인의 고통에서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문득 생각난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쌍용차 노조를 보면서 새삼 야만의 시대임을 생각하게 된다. 어지간한 범법자도 그렇게 다구리 쳐서 때려 잡진 않을거다. 더욱이 날 환장하게 만드는 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인데 세상 그렇게 무식 할 수가 없다. 맞아도 싸다고? 세상에…
나이먹고 대학나왔다고 저절로 사람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국의 세월은 아첨과 비열함을 가르치고, 중/고등학교는 대학가는 법을 가르치고, 대학에선 술과 처세를 가르치지 지식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됨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멍청한 컴퓨터와 TV를 끄고 악취나는 입를 닫고 책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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